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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스테이블코인은 어떻게 디지털 달러의 유통망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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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중소기업이 금요일 밤 해외 거래처에 대금을 보내야 한다고 가정해 보자. 기존 국제송금이라면 은행 영업시간, 중개은행, 환전, 국가별 결제망을 거쳐야 한다. 수수료가 얼마인지보다 더 답답한 것은 돈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상대방이 언제 받을지 한눈에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런데 달러 가치에 연동된 토큰은 스마트폰 지갑 사이를 24시간 이동한다. 스테이블코인이 ‘디지털 달러의 유통망’으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비트코인처럼 가격 상승을 목표로 만들어진 자산과 성격이 다르다. 대표적인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1개가 1달러의 가치를 유지하도록 설계된다. 이용자가 발행사에 달러를 맡기면 토큰이 발행되고, 토큰을 돌려주면 달러로 환매되는 것이 기본 구조다. 그 사이 준비자산은 현금·은행예금·미국 단기국채 등으로 운용된다. 겉으로는 토큰이지만 경제적으로는 ‘달러에 대한 상환 청구권’에 가깝다.
여기서 중요한 변화가 발생한다. 과거 달러를 쓰려면 달러 계좌와 은행망에 접속해야 했다. 이제는 인터넷과 지갑만 있으면 국경과 시간대를 넘어 달러 표시 가치를 주고받을 수 있다. IMF는 달러 표시 스테이블코인의 확산이 국경 간 지급과 송금에 새로운 경로를 제공하는 동시에 달러의 국제적 역할을 강화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1][2] 특히 통화가 불안하거나 달러 계좌 접근이 어려운 국가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이 투자 상품보다 저축·송금·결제 수단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달러가 은행 계좌 밖에서도 유통되는 새로운 경로가 생겼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민간기업이 발행하는 디지털 토큰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이는가. 첫째, 달러의 네트워크를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사용되면 현지 통화가 아니라 달러를 기준으로 가격을 표시하고 거래하게 된다. 둘째, 준비자산을 통해 미국 국채 수요가 늘어날 수 있다. 주요 달러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는 환매에 대비해 현금과 미국 단기국채 등 유동성 자산을 준비자산으로 보유한다. 정확한 규모는 발행사별 최신 공시와 준비자산 검증보고서로 확인해야 한다.[3] 스테이블코인이 커질수록 발행사는 환매에 대비해 더 많은 유동성 자산과 단기국채를 필요로 한다. 셋째, 블록체인 기반 결제망의 주도권을 다른 통화권에 넘기지 않을 수 있다.
2025년 미국이 지급결제용 스테이블코인의 연방 규율을 마련한 배경도 이 세 가지가 맞물려 있다. 핵심은 ‘코인을 허용한다’는 선언보다 발행자 자격, 1대1 준비자산, 환매, 공시와 감독 원칙을 제도화한 데 있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자유방임의 사설화폐가 아니라 규율된 디지털 지급수단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미국 재무장관이 이를 ‘인터넷 네이티브 달러 결제망’으로 표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숫자를 볼 때는 냉정해야 한다. 온체인 원시 거래량은 동일 주체 간 이동, 거래소 활동과 자동화 거래를 포함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카드 결제액이나 실물경제 지급액과 직접 비교해서는 안 된다.[2][4] 거대한 거래량의 상당 부분이 거래소 자금 이동, 차익거래, 담보 재배치, 봇 거래에서 발생한다는 뜻이다. 스테이블코인이 이미 카드와 은행송금을 대체했다고 말하는 것은 이르다. 가능성과 채택은 다르고, 온체인 거래량과 실사용은 더욱 다르다.
‘1달러’라는 이름도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준비자산의 질이 낮거나, 환매 창구가 막히거나, 수탁은행이 흔들리면 1달러의 약속은 깨질 수 있다. 발행사가 보유한 자산의 만기와 유동성, 독립적인 검증보고서, 이용자의 직접 환매 권리, 파산 시 준비자산의 법적 격리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블록체인에서 토큰의 이동 내역을 볼 수 있어도 은행계좌와 국채 보관 상태까지 자동으로 투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원장의 투명성과 준비자산의 건전성은 별개의 문제다.
또 다른 쟁점은 금융시스템의 변화다. 사람들이 은행예금을 스테이블코인으로 옮기면 은행의 안정적인 소매예금이 줄어들 수 있다. 발행사가 준비자산을 단기국채에 집중하면 국채 수요는 늘지만, 시장 불안으로 대규모 환매가 발생할 때는 자산 매각 압력도 커진다. 신흥국에서는 달러 접근성이 좋아지는 장점과 함께 자국 통화의 사용 기반과 통화정책이 약해질 위험이 생긴다. 디지털 달러의 편리함은 미국에는 패권의 확장이지만 다른 국가에는 통화주권의 질문이 될 수 있다.
한국도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만으로는 부족하다. 누가 발행할 것인지, 준비자산을 어디에 보관할 것인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원화 환매를 보장할 것인지, 은행·핀테크·블록체인 사업자의 책임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가 먼저다. 국내에서만 쓰이는 토큰을 하나 더 만드는 것으로는 글로벌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네트워크 효과를 이기기 어렵다. 무역·관광·콘텐츠 정산·해외송금처럼 원화 기반 디지털 결제가 실제로 필요한 시장을 찾아야 한다.
스테이블코인의 본질은 ‘가격이 안정된 코인’이라는 정의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화폐가 은행의 영업시간과 국경을 넘어 소프트웨어처럼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다만 유통망이 빨라질수록 그 위를 흐르는 돈의 신뢰가 더 중요해진다. 누가 발행하고, 무엇으로 뒷받침하며, 누구에게 환매할 수 있고, 실패하면 누가 책임지는가. 이 네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스테이블코인은 디지털 달러가 아니라 달러처럼 보이는 디지털 약속일 뿐이다.
달러는 지금 블록체인을 통해 새로운 유통망을 만들고 있다. 다음 경쟁은 토큰을 먼저 발행하는 나라가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화폐와 실질적인 사용처, 그리고 국경을 넘는 네트워크를 함께 설계하는 나라가 이길 것이다.
주요 참고자료
[1] IMF, 스테이블코인과 글로벌 결제https://www.imf.org/en/blogs/articles/2025/12/04/how-stablecoins-can-improve-payments-and-global-finance
[2] IMF, 국제 스테이블코인 흐름 추정https://www.imf.org/-/media/Files/Publications/WP/2025/English/wpiea2025141-source-pdf.ashx
[3] FSB,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최종 권고https://www.fsb.org/2023/07/high-level-recommendations-for-the-regulation-supervision-and-oversight-of-global-stablecoin-arrangements-final-report/
[4] BIS, 스테이블코인 논쟁의 틀
https://www.bis.org/speeches/sp26042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