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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진의 블록체인 아카이브] 드디어 돈이 된 ‘엔화 스테이블코인’

원문 추출 본문

[박혜진 서강대학교 AI⋅디지털자산 최고위과정 주임교수] 일본 물류 대기업 AZ-COM 마루와가 엔화 스테이블코인 ‘JPYC’로 대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아마존 배송을 담당하는 회사다. 지급 대상은 약 2300개 운송 파트너사와 개인 운전기사들이다. 스테이블코인이 마침내 실물 경제의 결제 현장으로 내려왔다. 거래소에서 코인을 사고파는 이야기도, 기관 간 시범 사업 이야기도 아니다. 매일 물건을 나르는 2300개 협력업체와 개인 기사들이 실제로 받는 돈의 형태가 바뀌었다는 이야기다. 일본이 걸어온 길 지난 2023년, 개정 자금결제법이 시행되며 스테이블코인이 전자결제수단으로 제도권에 편입됐다. 발행 자격은 인가 은행, 신탁회사, 등록 자금이동업자로 한정됐다. 2025년 8월, 스타트업 JPYC가 자금이동업 라이선스를 취득했다. 두 달 뒤인 10월, 일본 최초의 합법 엔화 스테이블코인이 발행됐다. 은행이 아니라 스타트업이 먼저였다. 지난 2월에는 SBI와 스타테일이 기관·국경간 결제용 JPYSC를 공식발표하고 얼마 전 출시에 성공하였다. 6월 10일, 미쓰비시UFJ·미즈호·SMBC 3대 메가뱅크가 2027년 3월까지 공동 스테이블코인으로 실제 상업 거래를 시작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이번 주, 물류 대기업이 2,300개 협력사 대금을 스테이블코인으로 지급한다. 법 → 스타트업 → 기관 → 은행 → 실물 경제. 3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 순서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가장 작은 플레이어가 가장 먼저 나섰다는 점이다. 실패해도 시스템이 흔들리지 않는 작은 회사가 먼저 길을 냈고, 수요가 증명되자 기관과 은행이 규모를 들고 들어왔다. 한국의 논쟁은 정반대 지점에 서 있다. 누가 먼저 발행할 자격이 있는가. 은행이어야 하는가, 비은행도 되는가. 이 질문에 답을 못 낸 채로 시간이 흐르고 있다. 발행 주체를 정하는 것이 시장을 만드는 일이라고 착각하는 사이, 일본은 발행 주체를 여러 층으로 열어두고 각자 자기 속도로 달리게 했다. 진짜 수요는 어디에 있었나 마루와 사례가 알려주는 또 하나는, 스테이블코인의 실수요가 어디에 있느냐다. 2300개 협력사와 개인 기사. 소액이고, 빈번하고, 상대가 많다. 기존 은행 송금 체계에서 가장 비효율이 큰 영역이다. 건별 수수료가 붙고, 영업시간에 묶이고, 정산 주기가 늘어진다. 원청과 하청이 층층이 쌓인 구조에서 대금이 아래로 내려오기까지 며칠씩 걸린다. 이것은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의 건설 하도급, 물류 위·수탁, 플랫폼 노동자 정산, 콘텐츠 창작자 수익 배분. 구조가 똑같다. 스테이블코인이 가장 먼저 유용해질 자리는 개인의 커피값 결제가 아니라 바로 이런 곳이다. JPYC의 지표가 이를 뒷받침한다. 자산 회전율이 일 기준 100%를 넘어섰다. 보유 목적으로 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발행된 액수보다 더 많은 금액이 매일 돌고 있다는 뜻이다. 투기 자산이 아니라 화폐로 기능하고 있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다. 발행 한도가 ‘1일 100만 엔’에서 ‘1회 100만 엔’으로 바뀐 것도 결정적이었다. 개인용 실험이 기업 간 정산 도구로 승격되는 순간이었다. 한국 인프라 위에서 달리는 엔화, 그리고 우리 JPYC는 현재 4개 블록체인에서 발행된다. 이더리움, 폴리곤, 아발란체, 그리고 카이아다. 카이아는 카카오의 클레이튼과 네이버 라인의 핀시아가 합병해 만든 체인이다. 한국 빅테크 두 곳이 만든 블록체인 인프라다. 즉, 한국이 만든 레일 위를 일본 엔화가 달리고 있다. 그동안 원화는 온체인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행히 한국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부는 하반기 경제성장전략을 통해 디지털자산기본법 입법으로 스테이블코인 제도화의 법적 기반을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늦었지만 방향은 잡혔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속도뿐이다. 그동안 되풀이되던 반박들은 이미 답을 얻었기 때문이다. ‘대체 어디에 쓰느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일본의 물류 대기업이 2300개 협력사에 대금을 지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 세계가 매일 수요를 증명하는 중이다. 쓸 곳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만 쓸 수 없었을 뿐이다. ‘안전하지 않다’는 우려가 있지만 우리 기술이 이미 일본 엔화의 유통 인프라로 검증받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된다. 남의 나라 통화를 실어 나를 만큼 안전한 레일이, 정작 우리 원화만은 태우지 못한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지금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원화가 아시아 온체인 결제망에서 차지할 수 있었던 자리다. 앞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빨리라도 가야한다. 저작권자 © 오피니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